보노네스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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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보노네스 1세는 파르티아 왕 프라아테스 4세의 아들로, 로마에서 교육받은 후 파르티아 왕으로 즉위했다. 그는 로마식 습관과 친로마 정책으로 파르티아 귀족들의 반발을 샀고, 아르타바누스 2세와의 내전에서 패배하여 축출되었다. 이후 아르메니아 왕이 되었으나, 파르티아의 압력으로 쫓겨나 로마령 시리아에 감금되었다가 탈출을 시도하다 살해당했다. 보노네스 1세의 죽음은 파르티아 귀족 사회를 분열시켰으며, 그의 아들은 파르티아 왕위를 되찾으려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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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노네스 1세 | |
---|---|
기본 정보 | |
이름 | ヴォノネス (보노네스) |
다른 표기 | ΟΝΩΝΗΣ (그리스어) |
칭호 | 제왕 |
왕조 | 아르사케스 왕조 |
통치 | |
국가 | 파르티아 제국 |
재위 기간 | 8년 – 12년 |
국가 | 아르메니아 왕국 |
재위 기간 | 12년 – 18년 |
이전 통치자 (파르티아) | 오로데스 3세 |
다음 통치자 (파르티아) | 아르타바누스 2세 |
이전 통치자 (아르메니아) | 티그라네스 5세와 에라토 |
다음 통치자 (아르메니아) | 아르탁시아스 3세 |
가족 관계 | |
아버지 | 프라아테스 4세 |
어머니 | 스키타이 공주 (?) |
자녀 | 메헤르다테스 |
생애 | |
사망 | 19년 |
사망 장소 | 킬리키아 (현재의 튀르키예) |
기타 정보 | |
종교 | 조로아스터교 |
2. 생애
보노네스 1세는 파르티아 왕 프라아테스 4세의 장남으로, 어린 시절 정치적 이유로 형제들과 함께 로마로 보내져 그곳에서 성장했다.[1]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이를 로마의 우위를 선전하는 데 활용했다.[2]
기원후 6년, 파르티아 왕위 계승 문제로 귀족들이 로마에 새 왕을 요청하자 아우구스투스는 보노네스를 보냈다.[3] 그러나 로마식 교육을 받은 보노네스는 파르티아 귀족들에게 '로마의 앞잡이'로 여겨져 반발을 샀고,[3][4] 결국 아르타바누스 2세와의 내전에서 패배하여 왕위를 빼앗겼다.[4]
이후 보노네스 1세는 아르메니아로 망명하여 기원후 12년 왕위에 올랐으나,[5] 아르타바누스 2세의 계속된 압력과 로마의 정책 변화로 인해 다시 쫓겨났다. 로마는 아르타바누스 2세와의 협상을 통해 보노네스에 대한 지원을 철회하고 그를 시리아에 감금했다.[6] 이후 킬리키아로 이송된 그는 기원후 19년 탈출을 시도하다 살해당했다.[7][8][4]
보노네스 1세의 죽음 이후, 파르티아 내에서는 아르타바누스 2세의 지배에 반발하는 움직임이 있었으며, 사카스탄, 드랑기아나, 아라코시아 지역의 파르티아 사트라프였던 곤도파르는 독립하여 인도-파르티아 왕국을 세웠다. 그는 "대왕 중의 왕"과 "'''Autokrator'''"라는 칭호를 사용하며 독립을 과시했다. 보노네스 1세의 아들 메헤르다테스는 훗날 파르티아 왕위를 주장하기도 했다.
2. 1. 배경 및 초기 생애
보노네스는 파르티아의 왕 프라아테스 4세의 장남이었다. 고대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에 따르면, 보노네스의 어머니는 스키타이 왕족과 관련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프라아테스 4세는 통치 초기에 찬탈자 티리다테스 2세에게서 왕위를 되찾기 위해 기원전 30년경 스키타이의 도움을 받았는데, 이 과정에서 이루어진 스키타이 부족장과의 혼인 동맹으로 보노네스가 태어났을 가능성이 있다. 다른 기록에서는 그의 어머니를 비스테이바나푸스로 언급하기도 한다.프라아테스 4세는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옥타비아누스)와 강화 조약을 맺고, 이탈리아 출신 여자 노예였던 무사를 왕비로 맞이했다. 이후 무사가 낳은 아들 프라아타케스(훗날 프라아테스 5세)를 후계자로 삼으려는 계획 아래, 다른 아들들과의 왕위 계승 분쟁을 막기 위해 기원전 10년 또는 9년에 보노네스를 비롯한 세 명의 다른 아들(프라아테스, 세라스판데스, 로다스페스)을 로마에 인질로 보냈다.[1] 일부 기록에 따르면 이때 보노네스의 어머니 비스테이바나푸스도 함께 로마로 보내졌다고 한다.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이 사건을 파르티아가 로마에 굴복한 증거로 삼아 정치적 선전에 이용했으며, 자신의 업적을 기록한 ''아우구스투스 업적록''에도 이를 중요한 성과로 기술했다.[2] 로마로 보내진 보노네스와 형제들은 인질이었지만 손님과 같은 대우를 받으며 불편함 없이 생활했고, 보노네스는 로마에서 성장하며 로마식 관습과 교육을 받았다.
한편 파르티아에서는 프라아테스 4세가 왕비 무사에게 암살당하고, 그의 아들 프라아테스 5세(프라타케스)가 서기 2년에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프라아테스 5세는 귀족들의 지지를 얻지 못하고 서기 4년에 추방되었다. 뒤이어 왕위에 오른 오로데스 3세 역시 국내의 지지를 얻지 못하고 서기 6년에 암살당했다. 이러한 정치적 혼란 속에서 바빌로니아의 반(反) 오로데스 3세 세력은 로마에 있던 보노네스의 귀환을 요구했다. 아우구스투스가 이를 받아들여 보노네스는 파르티아로 돌아와 서기 6년에 보노네스 1세로 즉위했다.
2. 2. 파르티아 왕
기원후 6년경 오로데스 3세가 암살된 후, 파르티아인들은 아우구스투스에게 아르사케스 가문 출신의 새로운 왕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3] 이에 아우구스투스는 보노네스를 파르티아로 보냈고, 그는 보노네스 1세로 즉위했다. 하지만 로마인으로 교육받았기 때문에, 그는 파르티아 귀족들에게 로마의 앞잡이로 경멸받았으며 왕위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어려웠다.[3][4] 보노네스 1세는 로마풍의 관습과 교양을 바탕으로 파르티아에 로마 문화를 도입하고 친로마 정책을 펼쳤으며, 국내 그리스인 폴리스를 배려하여 그들의 지위를 향상시키려 했다.이러한 정책은 파르티아의 전통적인 대귀족들에게 큰 반발을 샀다. 특히 동부 영토를 기반으로 한 대귀족들은 아르사케스 가문 외가 혈통인 아트로파테네 메디아의 통치자 아르타바누스 2세를 왕으로 추대하여 보노네스 1세에게 반란을 일으켰다.[4] 보노네스 1세는 로마와 그리스인 폴리스를, 아르타바누스 2세는 대귀족과 중앙아시아의 유목민을 각각 지지 기반으로 삼아 약 4년간 내전을 벌였다. 초기에는 보노네스 1세가 우세하여 바빌로니아 방면의 지배권을 확보하기도 했으나, 동부 영토에서 세력을 회복한 아르타바누스 2세의 반격에 결국 패배했다. 기원후 12년경, 보노네스 1세는 아르타바누스 2세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파르티아에서 축출되었다.[4]
2. 3. 파르티아 내전
오로데스 3세가 기원후 6년경 암살되자, 파르티아인들은 아우구스투스에게 아르사케스 가문 출신의 새로운 왕을 요청했다.[3] 이에 아우구스투스는 로마에서 교육받은 보노네스 1세를 보냈다. 그러나 보노네스 1세는 로마식 관습과 교양을 익혔고 친로마적 정책을 펼쳤으며, 국내 그리스인 폴리스의 지위를 향상시키는 등 로마의 앞잡이로 여겨져 파르티아의 전통적인 대귀족들로부터 강한 반발을 샀다.[3][4]이에 동부 영토를 거점으로 한 대귀족들은 아르사케스 가문의 피를 이은 아트로파테네 메디아의 통치자 아르타바누스 2세를 새로운 왕으로 추대하여 보노네스 1세에게 반란을 일으켰다.[4] 이로써 파르티아는 내전에 돌입하게 되었다. 보노네스 1세는 로마와 그리스인 폴리스의 지지를 받았고, 아르타바누스 2세는 파르티아 대귀족들과 중앙아시아의 유목민들의 지지를 기반으로 삼았다.
내전 초기에는 보노네스 1세가 우세하여 바빌로니아 방면의 지배권을 확보하기도 했으나, 동부 영토로 물러났던 아르타바누스 2세의 반격으로 결국 패배했다. 서기 12년경, 보노네스 1세는 아르타바누스 2세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아르메니아 왕국으로 도망쳐 그곳의 왕이 되었다.[4][5]
2. 4. 아르메니아 왕과 최후
파르티아 내전에서 아르타바누스 2세에게 패배한 보노네스 1세는 아르메니아로 도망쳐 기원후 12년에 그곳의 왕이 되었다.[5] 그러나 파르티아의 새로운 군주가 된 아르타바누스 2세는 보노네스 1세를 아르메니아 왕좌에서 몰아내고 자신의 아들을 대신 임명하려 했으며, 아르메니아의 유력자들에게 보노네스 1세를 제거하도록 압력을 가했다. 로마는 이를 자국의 이익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하여 반대했고,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는 자신의 양아들 게르마니쿠스를 보내 이를 막도록 했다.하지만 당시 로마는 게르마니아에서의 군사적 패배 이후 대외적으로 소극적인 정책을 펼치고 있었기에, 보노네스 1세에게 실질적인 군사 지원을 보내지는 않았다. 결국 보노네스 1세는 로마의 지원을 받지 못한 채 기원후 15년경 아르메니아에서도 추방되어 로마의 속주인 시리아로 망명했다. 로마는 그를 시리아로 옮겨 감금했지만, 왕족으로서의 대우는 유지했다.[6]
기원후 18년, 로마의 게르마니쿠스와 파르티아의 아르타바누스 2세는 유프라테스 강의 한 섬에서 만나 협약을 맺었다. 이 협약을 통해 로마는 아르타크시스 3세를 아르메니아의 새로운 왕으로 인정하고 보노네스 1세에 대한 지원을 공식적으로 포기했으며, 아르타바누스 2세를 합법적인 파르티아 통치자로 인정했다. 이후 보노네스 1세는 킬리키아로 이송되었고,[7] 기원후 19년경 그곳에서 탈출을 시도하다가 경비병에게 살해당했다.[8][4]
3. 유산
보노네스 1세의 통치는 파르티아 제국이 로마의 영향력 아래 놓이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는 파르티아 귀족 사회 내부에 상당한 분열을 초래했다.[3][4] 그는 로마에서 교육받았기 때문에 많은 파르티아 귀족들에게 로마의 꼭두각시로 여겨졌다.[3][4]
보노네스 1세의 죽음과 아르타바누스 2세의 집권 이후, 파르티아 귀족 사회의 분열은 더욱 심화되었다. 모든 귀족이 아르사케스 왕조의 새로운 통치자를 지지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사카스탄, 드랑기아나, 아라코시아 지역의 파르티아 총독이었던 곤도파르는 아르타바누스 2세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인도-파르티아 왕국을 세웠다. 곤도파르는 자신의 독립을 과시하기 위해 "대왕 중의 왕"과 Αὐτοκράτωρ|아우토크라토르grc (Autokratorla) 칭호를 사용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르타바누스 2세와 곤도파르 사이에 인도-파르티아 왕국이 아르사케스 왕조 문제에 개입하지 않기로 하는 일종의 합의가 있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한편, 보노네스 1세에게는 아들 메헤르다테스가 있었는데, 그는 훗날 서기 49년부터 51년까지 파르티아 왕위를 되찾기 위해 시도했다.
참조
[1]
서적
[2]
서적
[3]
서적
The Annals
[4]
간행물
Vonones s.v. Vonones I.
[5]
서적
The Annals
[6]
서적
The Annals
[7]
서적
The Annals
[8]
서적
The Anna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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